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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씨, 안씨, 김씨...조선총독부사관이 그리우면,
일본 가서 밥 벌어 먹어야지,
왜 한국인 탈 쓰고 국민세금 축내나...
http://m.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2122
앞서 〈한국일보〉에 나와 설쳐 된 현대판 황국신민들은 낙랑군의 위치가 평양이란 사실이 “100년 전에 이미 논증이 다 끝났다”고 했다.
그렇다면 100년 전에 역사학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일제는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 총독부 취조국과 그 뒤를 이은 참사관 실에서 한국사 관련 사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해 일본에 가져가거나 불태웠다.
1915년 중추원으로 관련 업무를 이관했다가 백암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가 국내에 유포되어 민족혼을 일깨우자
1916년 7월 중추원 산하에 〈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를 구성했다.
‘조선반도사’라는 틀 속에 한국사를 가두는 것이었는데, 그 핵심이 바로 ‘한사군 한반도설’과 ‘임나일본부설’이었다.
〈조선반도사〉는 총6권으로 편찬할 계획이었는데,
제1편 상고~삼한, 2편 삼국, 3편 통일신라는 지금도 한국 역사학계에서 존경해 마지않는 조선총독부의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집필했다.
그중 낙랑군 조를 보자.
“낙랑군, (조선)현은 위씨(위만)조선의 본지本地에 설치하였으며,
그 군치(郡治:낙랑군을 다스리는 곳)는 위씨의 고향인 왕검성, 즉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조선총독부, 〈조선반도사〉, ‘한(漢) 영토시대’)”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반도사〉에서
‘낙랑=평양’이라고 비정한 것이 현대판 황국신민들이 “100년 전에 이미 논증이 다 끝났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근거다.
* ‘1백 년 전에 논증이 끝났다’는 식민사학 전위대들,
스스로 황국신민임을 고백하다.
1백 년 전 독립투사들은 황국사관과 역사전쟁 중이었다...
역사학은 사료로 말하는 학문이다.
문헌사료와 고고학 사료를 아무리 뒤져도 ‘낙랑=평양설’이 맞는다면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기경량, 안정준 같은 ‘무서운 아이들’은 물론 그 스승들도 절대 1차 사료로 말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온갖 현란한 문장을 늘어놓고는 ‘논증이 끝난 문제’라고 주장한다.
“논증이 끝났다.” 라고 말하려면 ‘낙랑=평양설’이란 명제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가 없어야 한다.
‘1+1=2’라는 명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수학자는 없다.
그러나 ‘낙랑=평양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학자가 없었는가?
주목해야 할 인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었던 석주 이상룡(서기1858~1932) 선생이다.
이상룡은 서기1911년 초에 고향 안동에서 만주로 망명하면서 망명일기인 〈서사록西徙錄〉을 쓰는데,
여기에 이미 “(한)사군의 땅은 압록강 이동以東을 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서사록」, 1911년 2월 24일)”라고 논했다.
또한 「안화진에게 답합니다(答安和鎭)」라는 편지에서도
“(한)사군의 옛터가 모두 요동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석주유고』 권3)”
라고 거듭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가 아니라 요동에 있었다고 논했다.
마치 일제가 ‘한사군 한반도설’, ‘낙랑군 평양설’을 주창할 것을 미리 알았다는 식이다.
지식인의 예언자적 사명이 이렇게 드러난 것이다.
이상룡의 선조는 〈단군세기〉의 저자라고도 알려져 있는 고려 말의 행촌杏村 이암(李嵒:1297~1364)인데, 고려 말부터 사관 집안이었다.
이상룡은 만주로 망명한 후 한 손에는 총을 들고 한 손에는 붓을 들고 일제와 싸운 만주 무장투쟁의 대부이자 교민 자치 조직의 대부이고, 역사학자이다.
서기21세기판 황국신민들이 “100년 전에 이미 논증이 다 끝났다”고 주장하던 그 시기에
이상룡 일가와 우당 이회영 형제 일가 등의 망명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은
이상룡이 지은 〈대동역사大東歷史〉로 국사를 공부했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이
“방과 후에 나는 국사를 열심히 파고들었다.”라고 회고했는데,
물론 〈대동역사〉를 열심히 파고들었다는 말이다.
〈대동역사〉는 지금 전하고 있지 않지만 이상룡의 〈서사록〉이나 다른 글들을 통해 ‘낙랑=평양설’을 부인하는 내용이 담겼을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서기1917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낙랑=평양설’이 논증이 끝났다고 가르칠 때 신흥무관학교에서는 ‘낙랑=요동설’을 가르쳤다.
이상룡뿐만 아니었다.
단재 신채호도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상고사〉에서
“만반한·패수·왕검성 같은 위만의 근거지는 지금의 해성·개평이었다……
한사군은 요동반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현대판 황국신민들은 100년 전에 논증이 끝났다고 단언했지만
일본인이 된 것에 감읍하는 소수의 친일파들 이야기고 일제의 통치를 부인하는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들과 대다수 한국인들은 아무도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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